[Mapping Busan] 고성호 건축가 ❷
건축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풍경이 될 때
인터뷰 진행에 앞서 고성호 건축가의 프로필을 받았을 때, 인상깊은 문장이 있었다.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의 개념을 넘어 그 속의 생활을 조직하고, 그 너머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숭고한 표현이다.’ 건축물을 하나의 물질적인 구조물로 보지 않고 그 주변과 어우러지는 새로운 풍경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문장이었다. 섬진강이 보이는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그가 수영강이 흐르는 곳에 사옥을 지은 것도 당연히 우연은 아니다. 고성호 건축가가 설계한 ‘칠암사계’와 ‘선유도원’은 그 주변의 바다, 수원지와 어우러지며 부산만의 고유한 풍경으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모두가 외면하던 곳이었던 그 일대는 이제 사람들로 북적이며 다시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잘 만들어진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선순환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하는 그는 부산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동시에 부산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부산사람’이었다.
고성호 건축가
두 프로젝트 모두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칠암사계와 선유도원이 있던 두 지역 모두 기획할 당시만 하더라도 소멸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칠암사계의 경우, 그곳은 1970년대에는 붕장어 위판장으로 붐비던 곳이었다. 그 이후에 먹거리가 얼마나 풍족해졌나. 자연스레 발길이 끊어지고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처음 갔을 때만 하더라도 전체 마을의 20%정도가 비어져 있었다. 건축을 통한 선순환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칠암사계로 이름 짓고 착수했다. 지금은 연간 방문객이 약 60-70만명 정도에 이른다고 하는데, 방문객의 90%이상이 칠암이라는 지역을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지역에 대한 홍보를 카페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그 인근의 상권도 다시 부활했다. 70년대에 그곳에서 생업을 이어갔던 1세대의 자식들이 와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의 미래까지 예견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칠암 인근 지역이 자발적으로 재생이 되고,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고성호 건축가의 대표 프로젝트로 소개되고 있는 칠암사계
처음에 프로젝트를 의뢰 받고 공간을 둘러보는데, 바다가 잘 안보이는 땅이었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있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땅. 여기에서 건축적인 사고가 시작됐다. 바다근처에 와서 바다가 아닌 다른 걸 보게 된다면 그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는 거다. 칠암사계에는 총 7개의 정원이 곳곳에 있고,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네 계절을 뜻하는 사계라는 이름이 그래서 나온거다. 주어진 환경은 정말 어려웠지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울 수록 더 재미있게 임할 수 있다.
칠암사계의 낮과 밤
조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건물과 자연을 매개해주는 역할을 조경이 수행한다. 이러한 방식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로 지칭하기도 한다. 건축이 중심이 되고, 남는 자투리 공간을 정원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정원이 중심이 되어 건축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내가 한 건축물들은 모두 이 정원과의 관계성이 중요하다.
선유도원
선유도원 역시 설계할 때 지역성을 중시했다. 선유도원은 금정구의 선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선 선(仙)자를 쓴다. 선유도원은 그 한자를 네 글자로 풀어놓은 것으로, 신선이 거닐며 놀던 곳이라는 장소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것인데, 1600년대에 그는 해남 보길도에 들어가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건축물과 더불어 ‘세연정’이라고 이름 붙인 정원이 있는데,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건축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차경’의 개념을 선유도원에 적용시킨 것이다. 선유도원에 가시면 그 근처의 풍경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데, 가까운 정원을 근거리에서 보는 ‘서재’, 조금 더 멀리, 그러니까 회동 수원지와 그 인근의 풍경까지 내다볼 수 있는 ‘동재’의 개념을 선유도원안에서 풀어내 보려고 했다. 그리고 벽면은 가능하면 유리를 많이 사용해서, 선유도원 근처의 상점과 거리에서도 회동 수원지가 그대로 보이게끔 유도한 것이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그 풍경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선유도원
그렇다.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시도해온 건축물들은 결국 그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녹아 든다. 사람들에게는 흔적이나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그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건축의 선순환이다.
성림목장
50여년이 된 3만펑 정도 부지를 가지고 있는 목장이었다. 우유를 생산하던. 그곳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축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철거했다. 흔적을 남겼던 이유는, 그 장소의 스토리를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원래 그대로 ‘성림목장’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축사의 형태를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잘 보존하고 싶었고, 그럼으로써 그곳에서 실제로 노동하며 삶을 꾸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그곳에 오는 손님들, 예컨대 아이들은 자기가 마시는 우유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게 되는 거다. 자연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교육의 효과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성림목장
칠암사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극곰 조각이 있다. 칠암 지역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육지로 넘어온다. 미역 같은 해산물을 직접 주울 수 있을 정도다. 지역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월파되는 횟수가 예전에 비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기후변화 때문이다. 그래서 칠암사계를 지을 때 해수면의 변화를 고려해서 경사로의 형태를 만들었고, 염분에 강한 재료들로 구성을 했다. 이런 부분들은 그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위트 있게 풀어내기 위해 변대용 작가가 만든 북극곰 형태의 조각을 공간 곳곳에 배치하게 되었다.
성림목장
그렇게 된다면 건축가로서는 매우 보람 있을 것 같다. 보통 부산을 오면 잘 알려진 관광지를 방문하거나, 돼지국밥과 같은 지역음식을 먹는 게 가장 일반적이지 않나. 짧게 라도 부산의 라이프 스타일을 건축과 함께 경험해본다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부산의 지역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부산에 대해 다양한 감각으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성호 건축가
이제껏 이야기해왔던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데, 부산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 곳에 머물면서 위로 받고 치유할 수 있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산을 감각할 수 있는 식당, 전시공간, 숙박시설 등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곳을 마련해서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을 꿈꿔왔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 사옥과 주변이 공간들도 그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공들여온 곳들이다. 시간을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소비하느냐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갈 것이다.